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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1세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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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프 1세는 1060년부터 1108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한 카롤링거 왕조의 왕이었다. 그는 앙리 1세의 아들이자, 서유럽에서 드문 그리스어 이름을 사용했다. 필리프 1세는 통치 기간 동안 봉건 영주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벡생과 부르주를 합병하여 왕실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또한 1092년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 베르타와 이혼하여 파문당했고, 제1차 십자군 전쟁이 발발했을 때 교황과의 갈등으로 인해 직접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다. 필리프 1세는 믈룅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뒤는 아들 루이 6세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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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1세 (프랑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필리프 1세의 인장
군주 칭호프랑크인의 왕
재위 시작1060년 8월 4일
재위 종료1108년 7월 29일
대관일1059년 5월 23일 (공동 왕으로서)
대관식 유형프랑스
선임자앙리 1세
후임자루이 6세
섭정키예프의 안 과 보두앵 5세 (1060년~1067년)
섭정 유형섭정
배우자베르타 판 홀란드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
자녀콩스탕스, 안티오크 공주
루이 6세
세실, 갈릴리 공주
자녀 정보더 보기...
왕가카페
아버지앙리 1세
어머니키예프의 안
출생일기원전 1052년경
출생지샹파뉴에퐁텐
사망일1108년 7월 29일 (56세)
사망지믈룅
매장지플뢰리 수도원, 생브누아쉬르루아르
기타 정보
프랑스어 이름Philippe Ier
별칭사랑에 빠진 왕
로마자 표기
프랑스어Philippe I

2. 어린 시절

필리프는 1052년 5월 23일 샹파뉴에퐁텐에서 앙리 1세와 그의 아내 키예프의 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 '필리프'는 키예프 루스 출신인 어머니 안나가 지어준 것으로, 그리스어 Φίλιππος|필리포스gre('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당시 서유럽에서는 흔치 않은 이국적인 이름이었는데, 이는 동유럽 왕가의 혈통을 강조하여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필리프에게는 그보다 조금 어린 동생 위그(Hugues)가 있었다.

1059년, 아버지 앙리 1세는 필리프가 7살일 때 랭스에서 그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1060년 앙리 1세가 사망하자 필리프는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안나와 외숙부인 플랑드르의 백작 플랑드르의 보두엥 5세가 공동으로 섭정을 맡았다. 특히 안나는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여성 섭정으로 기록된다. 공동 섭정 체제는 필리프가 14살이 되던 1066년까지 지속되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필리프는 스스로 통치에 참여하여 자신의 인장으로 왕실 문서에 서명했으며, 공동 섭정인 보두엥 5세와 함께 플랑드르 지역을 여러 차례 방문하며 행정 경험을 쌓았다. 보두엥 5세는 이 기간 동안 왕과 봉신들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필리프는 14세가 되던 해에 보두엥 5세의 아들인 플랑드르의 보두엥 6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3. 통치 기간

필리프 1세 시기 드니에


필리프 1세는 7세에 즉위하여 초기에는 어머니 안느가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여성 섭정으로서 1066년까지 실권을 행사했다. 그의 이름 '필리프'(Philippe)는 어머니 안느가 지어준 것으로, 당시 서유럽에서는 생소한 그리스어 기원의 이름(Φίλιππος,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이는 동유럽 왕가의 혈통을 강조하여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재위 기간 동안 그는 플랑드르 계승 문제에 개입했으나 1071년 카셀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아버지 앙리 1세 시대와 마찬가지로, 권력욕 강한 봉신들의 반란에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1077년 잉글랜드정복왕 윌리엄과 강화를 맺어 브르타뉴에 대한 그의 야심을 저지했고, 1082년에는 벡셍을 왕령지에 병합했으며, 1100년에는 부르주 자작령을 확보하는 등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그는 1060년에 알베릭을 초대 프랑스 대무관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필리프 1세의 통치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그의 결혼 문제였다. 1072년 홀란트의 베르타와 결혼하여 후계자인 루이 6세를 얻었으나, 이후 앙주 백작 풀크 4세의 부인인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베르타와 이혼하고 1092년 베르트라드와 재혼했는데, 이 과정에서 교회법을 무시하여 교황청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이로 인해 1094년 처음 파문을 당했고,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는 교황 우르바노 2세에 의해 다시 파문이 선포되었다. 파문은 여러 차례 해제와 재선포를 반복하다가 1104년에야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샤르트르의 이보와 같은 저명한 성직자와 충돌하기도 했다.

이러한 교회와의 갈등 때문에 필리프 1세는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선포된 제1차 십자군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 대신 그의 동생인 베르망두아의 위그가 주요 인물로 참여했다.

결혼 문제와 파문으로 인해 필리프 1세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재위 후반기에는 실권이 아들 루이 6세에게 넘어갔다.[4] 그는 1108년 7월 29일 믈룅 성에서 사망했다. 스스로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여 카페 왕조의 전통적인 매장지인 생드니 대성당이 아닌 생브누아쉬르루아르 수도원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의 바람대로 그곳에 안장되었다.[4]

3. 1. 플랑드르와의 갈등

플랑드르의 보두엥 5세가 사망한 뒤, 그의 동생인 프리슬란트의 로베르가 플랑드르를 차지했다. 보두엥의 미망인 리실다는 필리프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1071년 카셀 전투에서 로베르에게 패배하였다.

3. 2. 봉신과의 관계



필리프 1세는 아버지 앙리 1세처럼 재위 기간 동안 권력욕에 찬 봉신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060년에는 알베릭을 최초의 프랑스 대무관장으로 임명했다.

플랑드르의 보두엥 6세가 1070년에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프리지아의 로베르가 플랑드르를 장악했다. 필리프는 보두엥 6세의 미망인 리실다를 지원하여 플랑드르를 침공했으나, 1071년 카셀 전투에서 로베르에게 패배했다.

1077년에는 잉글랜드정복왕 윌리엄브르타뉴를 합병하려 하자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돌 드 브르타뉴를 구원하고 윌리엄의 침공을 저지했다. 결국 윌리엄은 항복하고 필리프와 강화를 맺었다. 1082년, 필리프 1세는 벡셍을 합병하여 왕실 영토를 확장했는데, 이는 윌리엄 1세의 아들 로베르 커토즈가 자신의 동생이자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한 윌리엄 루푸스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 조치이기도 했다. 또한 1100년에는 부르주의 지배권을 확보하고, 생드니와 코르비 수도원을 왕실 영토로 편입하는 등 왕권 강화에 힘썼다.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제1차 십자군이 선포되었지만, 필리프 1세는 교황 우르바노 2세와의 개인적인 갈등(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의 결혼 문제로 인한 파문) 때문에 직접 참여하거나 지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동생인 베르망두아의 위그는 십자군의 주요 참가자 중 한 명이었다.

말년에는 외교적 활동도 있었는데, 1106년 딸 콩스탕스를 안티오크의 공작인 보에몽 1세와 결혼시켰다. 이 결혼식은 샤르트르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1107년에는 생드니에서 교황 파스칼 2세를 만나 프랑스 왕국과 교황청 간의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 관계를 강화했다.

3. 3. 결혼과 파문

필리프 1세는 후계자를 얻기 위해 1072년 홀란트의 베르타와 결혼했다.[2] 이 결혼으로 아들 루이 6세 등을 두었다.

그러나 필리프는 앙주 백작 풀크 4세의 아내였던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 사랑에 빠졌다. 1090년경 왕비 베르타에게 싫증을 느끼고 그녀가 살이 쪄 매력을 잃었다고 여긴 필리프 1세는[2], 1092년 베르타에게 '너무 뚱뚱하다'는 이유를 대며 이혼을 요구했다. 그는 가짜 혈족 관계를 날조하여 교회에 혼인 무효 소송을 제기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3] 이후 1092년 5월 15일, 아직 전 남편 풀크 4세와의 이혼이 성립되지 않은 베르트라드와 재혼했다.[3] 이혼당한 베르타는 그녀의 지참금 영토였던 몽트뢰유 요새에 감금되었고 이듬해 사망했다.[2][4]

이 재혼은 교회법에 어긋나는 행위였기에 즉각적인 반발을 샀다. 1094년, 리옹 주교이자 교황 특사인 디의 위그는 오툉 시노드 결과에 따라 필리프 1세를 처음으로 파문했다. 이듬해인 1095년 11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 파문을 공식적으로 재확인했다.

필리프 1세는 베르트라드와 헤어지겠다고 약속하며 몇 차례 파문이 취소되기도 했으나, 그는 번번이 약속을 어기고 그녀에게 돌아갔다. 이 때문에 파문과 복권이 1104년까지 반복되었다.[4] 1101년에는 푸아티에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아키텐 공작 윌리엄 9세가 자신의 봉신인 필리프 1세가 자신의 영지에서 파문당하는 것을 막으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르바누스 2세는 파문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결국 1104년, 필리프 1세는 공개적으로 속죄를 하고 교회로부터 용서를 받았다. 이후 그는 베르트라드와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의 저명한 법학자였던 샤르트르의 이보 주교는 왕의 행동에 반대하며 충돌하기도 했다.

이 길고 복잡한 이혼과 파문 문제는 필리프 1세의 권위와 영향력을 크게 실추시켰다. 이로 인해 그는 제1차 십자군 원정에도 직접 참여하지 못했으며, 대신 동생인 베르망두아의 위그가 참가했다.[4] 재위 후반기에는 실권이 아들인 루이 6세에게 넘어갔다.

3. 4. 십자군 원정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제1차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다. 하지만 필리프 1세는 교황과의 갈등 때문에 십자군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앙주 백작 풀크 4세의 부인이었던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 결혼하기 위해 정식 부인 홀란트의 베르타와 이혼했고(베르타가 너무 뚱뚱하다고 주장), 이로 인해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다시 파문을 당한 상태였다. 비록 필리프 1세 본인은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의 동생인 베르망두아의 위그는 십자군의 주요 인물로 참여했다.

4. 죽음과 유산

13세기 필리프 1세의 석상


필리프 1세는 1108년 7월 29일 믈룅 성에서 거의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요청에 따라 조상들이 묻힌 생드니 수도원이 아닌 생브누아쉬르루아르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당대의 기록가인 쉬제르 수도원장은 필리프 1세가 말년에 국정을 소홀히 했다고 기록했다. 쉬제르에 따르면, 필리프 1세는 앙주 백작 부인 베르트라드를 차지한 후 그녀에 대한 열정에 빠져 왕으로서의 위엄을 잃고 나랏일에 흥미를 잃었다고 한다. 쉬제르는 "나라를 유지한 유일한 것은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루이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었다"고 평가했다. 쉬제르는 또한 필리프 1세가 생드니 수도원에 묻히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에 대해, 필리프 스스로 "그 교회를 (조상들이) 한 만큼 잘 대하지 않았고, 그토록 많은 고귀한 왕들 중에서 그의 무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필리프 1세의 뒤를 이어 아들 루이 6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쉬제르의 기록에 따르면 계승 자체에 큰 반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일부 기록에서는 계승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질로 생테브르(Gillot Saint-Evre)의 사후 초상화, 1837년

5. 자녀

'''베르타 드 홀란트'''와의 자녀

이름생몰년비고
콩스탕스1078년 – 1124/1126년샹파뉴 백작 위그 1세와 1094년 결혼했으나 1104년 이혼하고, 이후 안티오크 공작 보에몽 1세와 재혼함.
루이 6세1081년 – 1137년프랑스 국왕.
앙리1083년 – ?요절.
샤를1085년 – ?샤를뤼(Charlyeu) 수도원장.
외드1087년 – 1096년요절.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의 자녀[3]

이름생몰년비고
필리프1093년 – 1123년 이후망트 백작 (1109년–1123년 이후). 몽레리 영주 기 2세(Guy II de Montlhéry)의 딸 엘리자베트 드 몽레리와 결혼함.
플뢰리1093년경/1095년 – 1119년 7월/1145년경낭지(Nangis) 영주. 낭지 영주 엘리자베트와 결혼함. 플로랑(Florent), 플로뤼스(Florus)라고도 불림.
세실1097년경 – 1145년 이후갈릴래아 공작 탕크레드와 결혼하였고, 사별 후 트리폴리 백작 퐁스와 재혼함.
외스타시1100년경 – ?에탕프(Étampes) 백작 장(Jean d'Étampes)과 결혼함.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France https://books.google[...] Atlantic Monthly Press 2018-10-02
[2] 텍스트
[3] 텍스트
[4]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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